언러닝: 과거의 성공을 버리는 법

"내가 배웠던 것들을 하나씩 해체하면서 잘못 배웠던 것들을 지우고,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을 채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팀 동료의 이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나 역시 과거 호황기의 작은 성공에 취해 있었다. 이제는 언러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언러닝: 과거의 성공을 버리는 법

지금의 회사에서 일하면서 계속 고전하고 있다. 악전고투의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 계속 괴로워하다가 작년 1~2분기 정도에 스스로를 다시 다 해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는 간단했는데, 팀에서 정말 믿고 의지하던 스마트한 동료가 본인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배웠던 것들을 하나씩하나씩 해체하면서 잘못 배웠던 것들을 지우고,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을 채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매일 반복하고 있다.

이 말이 가슴에 너무 와닿았고, 그 동료의 리더로서 이 동료의 어려움을 내가 잘 캐치하지 못 했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너무 컸었다. 나 역시도 과거 호황기 시절의 작은 성공에 취해서 바뀐 거시 경제 흐름(호황기 -> 불황기), 바뀐 도메인(B2C 핀테크 -> B2B HR SaaS), 바뀐 팀(Toss -> Lemonbase)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한채 같은 패턴으로 일한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과거 성공의 취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같은 패턴을 반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언러닝(unlearning)과 리러닝(relearning)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패턴매칭의 오류: 왜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족쇄가 되는가

우리 뇌가 우리를 배신하는 방식

성공 경험이 있는 시니어들은 새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 본능적으로 과거와 비교하곤 한다. "아, 이거 예전에 그거랑 비슷하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나 반사적이라는 점이다. "반사적"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이 과정이 무의식적이면서 자동적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휴리스틱의 함정에 빠진 우리 뇌는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표면에 드러나는 유사한 몇가지 현상만 보고 "이번에도 될거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2010년대와 2020년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 호황기: 시장이 빠르게 성장, "빠른 실행"이 최우선, 제품이 조금 부족해도 OK
  • 불황기: 시장이 까다로워짐, "제품 완성도"가 핵심, Unit Economics를 처음부터 맞춰야 함

특히 "어설픈 성공"이 더 위험한 이유

대박을 친 사람보다 중박을 친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의 스타트업씬은 더 그렇다고 본다.

  1. 인과관계의 오해: 호황기엔 누구나 어느 정도 성공한다. 하지만 많은 리더들이 운과 실력을 구분하지 못한다.
  2. 과도한 일반화: "우리가 성장했던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특수한 상황의 성공을 보편적 진리로 착각한다.
  3. 학습의 종료: "나는 이미 성공 방정식을 안다"는 자만이 새로운 학습을 막는다.

그래서 당시 나는 언러닝에 대해서 여러 방향으로 학습했다. 그 과정에서 다음의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 내가 정리하고 했던 방법들을 적어본다.

성공의 취기를 깨는 "콜드 샤워"

1. 증상 진단: 나도 취해있는가?

다음 중 3개 이상 해당되면, 나 역시도 성공의 취기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 [ ] 중요한 대화를 하면서 "내가 OO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같은 과거의 작은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 [ ] 현재의 부진을 "시장 탓", "팀 탓"으로 돌리거나 특정한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 [ ] 피드백을 들으면 "그들이 아직 내 진의나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 [ ] 데이터보다 직감을 더 신뢰하거나, 어설픈 데이터 분석으로 의사결정을 진행한다.
  • [ ] "이 정도는 그래도 내가 쉽게 해낼 수 있지"라는 자신감을 가지지만 실상 자신감을 가지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당시 나는 3개 이상(아마 5개 모두) 체크할 수준이었고, 나 스스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2. 데이터 충격요법

당시 내 취기를 깨는 가장 빠른 방법은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 현재 성장률, 이탈률, NPS 등의 데이터를 노트에 네임펜으로 크게 적어서 매일 본다.
  • "만약 내가 투자자라면 이 회사에 투자할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 경쟁사 대비 우리의 실제 포지션을 분석한다. 고객이라면 경쟁사를 제끼고 우리를 선택할 것인지를 살펴본다.
  • 내가 회사를 알아보는 엄청난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회사에 몇 년을 다니면서 함께 성공을 만들고 싶을까?"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3. 역할 전환 실험

그 다음은 단순한 방법으로 접근해봤다. 내가 지금 회사의 Head of Product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월요일: 뉴비가 되어서 모든 것을 질문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 질문들을 다 기록한다.
  • 수요일: 고객 문의 내용을 대화 그대로 확인한다. 채널톡에 인입되는 모든 내용을 매일 저녁마다 읽는다.
  • 금요일: 경쟁사 제품을 사용하며 "왜 우리 제품보다 나은지"를 찾아본다.

4. 피드백 구하기

마침 그 이후 시점이 연간 리뷰 시간이었다. 스스로의 성과, 역량에 대해서 냉정하게 평가했고, 동료들이 적어준 피드백들도 반복해서 읽었다. 좋은 내용은 한 번만 읽어보고 치웠고, 안 좋은 내용들을 계속 반복해서 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일련의 언러닝 과정을 시작했다.

성공 해독 프로그램 (Success Detox)

초반부: 인정 (Acknowledgment)

일단 매일 "나는 과거의 성공에 취해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인정을 의시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과정이 좀 어려웠다. 2~3주 정도를 했던 것 같은데, 자기 부정이 만드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극복하는게 좀 쉽지 않았다.

그래서 2주차 정도부터는 과거의 성공에 대한 분석을 좀 더 해봤다. 정확한 지표를 보진 못 했지만 과거 이력서를 정리하면서 적어둔 각각의 성공에 내가 잘한 것, 내가 회사를 레버리징한 것(회사빨), 시대가 좋았던 것(운빨)을 러프하게나마 퍼센트(%)로 정리했다.

중반부: 비우기 (Emptying)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성공의 프레임워크들을 다 리스트업했다. 내가 의사결정을 할 때 쓰는 프레임워크들도 모아봤다. 사실 별다른 프레임워크를 안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라 이건 금방 끝나더라. -_-;;

그리고 이런 프레임워크 중에서 지금도 유효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반대로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적어봤고, 이 중에서 버려야 할 것들과 각각의 "유효 기간"을 정리해봤다. 예를 든다면, 당시 내 프레임워크 중에서 "속력이 모든 것을 다 덮어준다." 같은 Toss 시절의 마인드셋이 있었는데, 이건 바로 버려야 할 것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속도(vector)가 아니라 속력(scalar)로 표시했다.

후반부: 채우기 (Refilling)

마지막으로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하루에 1시간의 학습 시간을 확보해서 해외 케이스들을 다시 학습했고, B2B SaaS 도메인에서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이나 해외에서 일하는 분들의 경험을 계속 학습했다. 그리고 해외 B2B SaaS Product Manager들에게 LinkedIn으로 콜드콜을 보내서 어설픈 영어로 30분 정도씩 대화를 해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국내에 있는 B2B SaaS PM들은 다들 비슷한 상태(뭘 해야 성공하는거야?를 다 같이 모르는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실리콘밸리나 유럽에서 일하는 PM들을 타깃했다.

이렇게 배웠던 것들을 TIL(Today, I Learned) 양식으로 기록해봤다. 어떤 날은 의미 있는 학습이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적어봤다. 때로는 이런 무식함, 우직함도 필요하니까.


맑은 정신 유지하기

오랜 기간 취기에 절여진 몸은 한 번의 디톡스로 해결되지 않았다. -_-; 이래서 중독이 벗어나기 어렵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고, 다음의 루틴을 집어넣었다.

  • 고객 만나기: 1~2주 간격으로 고객을 계속 만났다. 고객을 만나기 전에 가설을 정리하고, 고객에게 직접 물으면서 가설을 검증했다. 정말 솔직한 질문을 반복하면서 내가 잘못 생각하는 지점이 어딘지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고객에게 "이 부분은 제가 좀 판단을 잘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불편함(pain point)은 제가 꼭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했다.
  • Unlearning Friday: 매주 금요일마다 이번 주에 했던 많은 결정과 선택 중에서 과거에 학습한 내용에 기인해서 무지성으로 한 것들이 있는지 찾아봤다. 제품 스펙의 결정과 같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하나 정해서 딥다이브를 해봤다. 약간 억지스럽게 할 때도 있었지만...언러닝에 좀 더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 Lesson Learned 작성: 이건 주기적으로 하진 않지만 발견될 때마다 적는다. 주로 Product Pager를 적을 때 함께 적는 편이다. 사실 지금 내가 관리하는 제품 정도면 대부분의 Pain Point들은 과거의 의사결정 실패에 기인한 것들이 많다. 그렇기에 과거의 의사결정들에 영향을 준 것(정보 수집에 실패했든, 고객에 대한 가설을 잘못 새웠든)을 정리하고 뭐가 틀렸는지, 뭐를 잘못 생각했는지를 적는다.
캡쳐는 최근 작성한 Product Pager에 적은 내용이다.

마치며

패턴매칭은 인간의 생존 본능이다.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관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족쇄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Learn), 버리고(Unlearn), 다시 배워야(Relearn) 한다.

성공의 취기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다시 성공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제 언러닝의 계기가 되었던, 제가 함께 일한 동료들 중에서 스마트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오는 저의 옛 동료 David에게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와 미안함을 전합니다.

Read more

Align의 3가지 체크 요소 - 지표, 기준, 그리고 조직

Align의 3가지 체크 요소 - 지표, 기준, 그리고 조직

제가 일하면서 챙기는 여러 가지 중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Alignment(정렬)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 목표와 연결되어 있는지, 산출물의 기준은 명확한지, 다른 팀과의 협업 구조는 원활한 협업이 가능한 구조인지. 특히 조직 간 이해 충돌을 Win-Win으로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좋은 사람을 갈아서 일하지 말고, 구조를 개선해야 합니다.

By Changyeong Ahn
뭘 '안 하는 것'의 어려움

뭘 '안 하는 것'의 어려움

전략은 뭘 하느냐가 아니라 뭘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다. 특히 수평적 조직에서는 모두가 '신호'를 캐치했다고 주장하지만, 의사결정권자에게는 신호와 소음이 뒤섞여 들어온다. 가장 어려운 것은 실행이다. 선택과 집중을 잘하려면 결정 과정의 합리성, 목표의 정렬, 그리고 성과 인정 체계를 살펴봐야 한다.

By Changyeong Ahn